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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CherryChoco

카라오소

마피아 X 학생

 

 

가려진 시야에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의 손길대로 나는 그가 나를 앉힌 곳에 가만히 앉아 둘 곳 없는 고개를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두었다. 곧이어 문을 닫는 소리와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로 추정되는 그 어딘가에 내려진 다리에 단단한 그의 몸 일부가 닿았다.

 

“이제는 단둘뿐이야, 오소마츠.”

 

나의 아래에서 뱉어진 그의 말에는 뜨거운 체온이 녹아 있었다.

 

*

 

그를 처음 보았던 날은 기억에 뚜렷이 남을 정도로 날이 맑았었다.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던 흰 구름에 이끌리듯 그대로 학교에서 뛰쳐나왔다. 충동이었고, 어떤 외로움의 표출이었다.

해가 뜬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갈 곳 없이 이곳저곳을 서성이다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 처박혔다. 담과 담 사이에 있는 골목은 좁고 어두웠다. 무릎을 세워 펴봤자 3/4만 겨우 펴지는 골목에 나는 멍하니 다리를 펴고 하늘을 봤었다. 골목에는 구름 한 점 끼지 않았던 하늘이었다.

해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갔을 때쯤부터, 서서히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더니 골목은 금세 너구리굴이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도 담배를 주었던가, 주지 않았던가. 그들의 얼굴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던가. 하는 그런 상세한 것은 다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얼마 안 있어 껄렁하게 하나둘 사라졌고 처량한 엑스트라의 둔탁한 소리를 배경으로 새파란 남자를 내 앞에 가져다 두었다.

 

“너도 한 패냐?”

 

목에 걸린 금목걸이가 옅은 햇빛에도 반짝였다. 단추를 몇 개 푼 새파란 와이셔츠는 촌스러울 만한데, 남자의 까만 정장 재킷에 의해 촌스러움은 새까맣게 죽었다. 하얘서 서늘해 보이는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멀뚱멀뚱 그를 보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남자의 자세가 삐딱해졌다.

 

“아니라면?”

 

시선도, 덩치도 그가 더 위였다. 아마 싸움 실력도 그가 더 위이리라. 딱 보아도 싸움을 전문직으로 삼은 사람과 내가 싸움이 될 리가 없었다. 내 대답에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 그 뒤에 뭐라고 했더라.

 

어찌 되었든 별일은 없었다. 그날에 그에게 맞은 기억은 없으니까. 나는 이미 깜깜한 시야에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묶은 끈 아래로 아직도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 같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잠시 잠에서 깼다. 목이 탔다. 옆으로 팔을 휘휘 저어보았지만 닿는 것이라곤 없었다.

 

안 그래도 깜깜할 방 안을 갑갑하기까지 한 시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공중에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몸을 웅크리고 바닥을 짚었다. 방향감각이 상실되는 기분은 항상 그래 왔지만, 더러웠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허리를 폈다. 침대에 몇 번 발을 찧기고 나서야 희미하게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

 

“어……”

 

어둠 위로 빛이 덧입혀진다. 멀리서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목소리다.

 

“흣, 오소마츠.”

 

무엇을 하는 것인지, 눈이 가려져 있어도 너무도 뻔하다 일이라 나는 입을 다물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정욕에 먹힌 이름이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 메아리쳤다. 이상하잖아, 아저씨. 여러모로 이상한 거잖아. 눈이 감기지 않아도 깜깜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리라 느끼며 타는 목을 침으로 몇 번이고 적시곤 정신을 잃었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서늘한 손가락이 뺨 위를 노닐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물.”

 

잠에서 깼을 때부터 찾던 것이었다. 뺨 위를 노닐던 손가락이 사라지며,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잠이 부족해 윙윙 울리는 정신과 짜증이 반 숟갈에서 한 숟갈로 넘어가자 발걸음이 다시 다가왔다. 단단한 손이 등을 지탱해서 상체를 일으킨다. 입술에 유리인지, 도자기인지 모를 것이 닿았다. 곧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물에 나는 꿀떡꿀떡 전부 삼켰다.

 

“미지근해.”

 

입가에 묻은 물기를 그가 손을 닦는다. 위에서 내다보는 중인지 그 부분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선다.

 

“아침부터 차가운 거 먹으면 해롭다, 오소마츠.”

 

어제인지, 새벽인지 모를 시간대와는 다르게 울리는 이름에 그에게로 몸을 기대었다. 컵이 어딘가로 놓이는 소리가 나며 그는 기꺼이 나를 받아들였다. 단단한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넘긴다.

 

“이거 언제 풀어줄 거야?”

 

손이 멈춘다. 엄지가 살살 뒤통수를 문지른다.

 

“불편하면, 직접 풀지, 그래.”

 

뱀의 혀가 따로 없다. 비아냥거림이 그대로 담긴 어투에 나는 다시 침대로 몸을 뉘었다.

 

“잘 건가?”

 

그의 물음에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서 귓바퀴를 돌아 귓불을 지분거리고는 자리에서 떴다.

 

“잘 자. 일어나면 부르고.”

 

문 닫는 소리가 들린다. 숨소리가 나 하나다. 저 멀리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나는 손을 뒤통수로 옮겨 아까 그가 만진 곳에 대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단단하게 묶인 천이 거치적거린다. 풀려면 풀 수야 있다. 조금 힘겹겠지만, 못 풀건 또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말대로 풀어버린다면, 그다음은?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아직도 감정과 마주 대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 준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어떤 것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내가 끈을 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모든 것을 그의 손 위에서 해야만 했다. 물을 마신다거나, 식사한다거나, 화장실을 간다거나 하는 것까지도. 종래에는 샤워까지 도와줄 기세던데, 글쎄. 아직 시도는 해보지 않았다. 남자는 내가 자신의 손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즐겼다. 내려가서 음식을 떠서 먹이고 다 먹으면 품에 안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가끔 내가 내려가고 싶지 않아 하면, 아예 이곳으로 가지고 와서 떠먹였다. 덕분에 여기 와서 몇 킬로일지는 모르겠지만, 몸무게가 확연하게 늘었을 것이란 건 당연한 사실일진대, 그는 침대에 누운 내 몸을 이리저리 만지고선 나날이 말라간다며 한숨을 지었다.

 

“아저씨 혹시 시력이 안 좋아?”

 

내 말에 그는 갈비뼈 그 부근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아래로 쓱 훑다가 내 허리를 낚아채서 끌어안았다.

 

“왜, 궁금해?”

 

심장박동이 빠르게 쿵쾅 뛰는 것이 들린다. 목소리에는 기쁨이 묻었다. 묘하게 톤도 올라간 질문에 나는 꼼지락 그의 품에서 움직이다가 한쪽 팔로 그를 마주 안았다.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소마츠?”

 

끝이 살짝 떨린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안경은 안 썼던 것 같은데, 아. 혹시 렌즈 꼈어?”

 

그의 입이 다물어진다. 숨소리가 만나서 엉키고 사그라졌다가 서서히 맞춰진다. 그가 뒤로 천천히 몸을 뺀다. 나는 그냥 그런 그를 놔주었다.

 

“시력은 안 나빠.”

 

목소리가 굳었다. 나쁘게 굳은 것은 아니지만, 마냥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흐응-.”

 

그의 손가락이 입술을 핥는다. 하나하나가 뜨겁다. 볼을 끝으로 사라진 온기는 또 내 귓바퀴에 머물렀다. 축축한 돌기가 귀를 한번 훑고서 살짝 물었다가 놓는다.

 

“오소마츠, 두 번째는 조금 더 생각하고 하는 것이 너에게도 좋을 거야.”

 

으르렁거리는 으름장이 퍽 무섭다. 나는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간신히 내보내며 웃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걸.”

 

손이 허공에서 다시 내 허리로 감아 든다. 귀 아래 뼈에 입술이 맞춰진다. 혀가 위아래로 너울거리다가 쇄골에서 멈췄다.

 

“뭐하는- 읏. 아저씨?”

 

그의 이빨이 살을 바르는 육식동물처럼 내 쇄골의 얇은 피부를 잘근 씹다가 빨기를 반복한다. 이 행동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지는 않아 발버둥을 치려해도 발끝에 닿은 그의 허벅지가 잔뜩 긴장으로 단단해지고 있어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벌려진 입 사이로 아픔인지 뭔지 모를 신음이 더해진다. 엄지발가락 끝에 살짝 무엇이 닿자 그 지분거림도 멈추었다.

 

“이젠, 어느 정도 알았길 바라. 알아서 처신해.”

 

낮은 울렁거림이 귓가를 스치다가 사라진다. 또다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쇄골에 손을 대기도 싫었다. 이미 가려진 눈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뭐라 대꾸하지도 못할 정도로 확실한 경고를 받아버렸다. 끝이 씁쓸하다.

 

“한 방 먹어버렸네-.”

 

아마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올 것이다. 그 정도의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황당해서인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하여간 건강도 하셔라.”

 

폭신한 베개를 한껏 끌어안고 뒹굴 거리다가 다시 위를 향해 누웠다. 푹 들어간 베개만큼이나 베개에서 그의 향이 풍겨 나왔다.

 

그는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다. 정확히는 식사시간을 맞춰서 돌아왔는데, 운동이라도 하고 왔는지 땀 냄새에 절여져 있었다.

 

“저녁은?”

 

내 말에 그는 숨소리를 조금 흩트리다가 대답했다.

 

“빨리 씻고 나올게.”

 

발걸음 소리와 욕실의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는 가만히 침대 위의 인형처럼 그를 기다렸다. 이 시간이 지루하기도, 지루하지 않기도 했다.

샤워실의 물소리가 끝나고, 바닥에 철벅거리는 소리가 다가오다가 멈춘다.

 

“어디서 먹을래?”

 

나는 소리가 나는 곳을 올려다보다가 침대 헤드에 기댔다.

 

“방.”

 

“곧 가져오도록 하지.”

 

말소리가 끝나자 철벅거리는 소리와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안대 속에서 눈을 꾹 감았다. 관자놀이가 조금 아프다. 먹지도 않은 밥이 얹히는 것 같다.

 

그가 나를 여기로 데려다 놓으면서 뭐라고 했더라. 저택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때까지는 아직 생생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지금은 모든 것이 흐릿하다. 가끔 손에 닿는 그의 얼굴이 가장 선명할 만큼. 딱 그만큼 흐릿하다.

 

식사하고, 늘 그렇듯 그의 손을 따라 씻고 그의 품에 안겨 이동을 한 후, 잠이 들고 아침이 오면 여전히 그가 있었다. 풀 수 있음에도 풀 수 없는 끈처럼, 모든 것은 위태로운 줄다리기 중 하나인지라 나는 끈처럼 또 침묵을 택했다.

 

 

하늘이 파랬던 날 이후로 그를 또 만났었다.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만났다. 가끔 길가에서 데이트, 그 비슷한 것을 했다.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맞춤 같은 것도 했다. 우리는 고백을 하지 않았지만, 사귀고 있었다. 꽤 달콤했던 시간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그와 그런 데이트를 즐겼다. 대학에 가게 되면, 그 대학 근처에 그가 집을 얻을 테니 같이 동거하자고도 그랬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리 되었냐 하면, 그것이 가장 흐릿했다.

 

그는 나를 이리 가둬놓고도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고백을 하지 않았을 뿐, 연인 사이였고 나는 이 일련의 행동 중 눈을 가리는 것을 제외하곤 커다란 거부감이 없었다. 그의 행동들이 제멋대로 인 것처럼 보여도 배려가 담겨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아니라면-.

 

아침 샤워를 위해 옷을 벗기는 손이 섬세하다. 닿아진 그의 어깨, 그 옆의 쇄골 그 골의 사이로 비누 향이 강하게 풍긴다.

 

“아저씨.”

 

내 말에도 그는 내 옷의 단추를 푸는 것에 열중하며 대답을 했다.

 

“왜 그러지?”

 

나는 발을 살짝 그의 정강에 닿을 정도로만 흔들며 질문을 이었다.

 

“왜 항상 먼저 씻어?”

 

꽤 아래로 간 손이 단추를 풀길 멈춘다. 나는 더듬더듬 그 손길을 찾으러 움직였고, 손은 그런 내 손을 피하듯 다시 움직여 상의를 벗겼다.

 

“뜬금없네.”

 

그걸로 끝. 샤워가 끝나는 동안에도 그는 별다른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새벽이 되면, 늘 목이 탔다. 멀리서 들리는 그의 열기가 아니었다면, 그를 항상 부르고 싶을 정도로 목이 탔다. 이렇게 저택에 묶여있는 상태라면, 한 번쯤 그냥 풀어도 괜찮을 텐데. 지난번의 그 이후로도 또 그 이전으로도 그는 나를 탐하지 않았다. 그저 새벽에 혼자 박혀서 내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가 제일 이상하게 느껴졌다. 조그만 위화감의 불씨였다.

 

아침마다 물을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항상 미적지근한 물이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나중에는 차가운 물을 줘도 못 마실 것 같다는 예감이 조금 들었다.

 

“아저씨.”

 

온전히 적셔지지 않은 목은 조금의 쇳소리를 동반했다.

 

“왜.”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왜 고백을 안 해요?”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이다. 그냥 정말 궁금해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연애를 해왔다. 사귀는 동안 둘 중 누구도 고백하지 않았다. 나름 잘 사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는 이 꼴이 되어있었다. 이쯤 되면, 그의 입버릇 중 하나였던 사랑한다는 말을 나에게 해줄 법도 싶건만 어찌 된 일인지 저택이 들어와서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하면 나도 응해 줄 마음이 있는데,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나도 말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물었다.

침묵은 오래됐다. 밖의 소음을 제외하고는 그의 숨소리마저 간헐적으로 들렸다. 어쩐지 심장이 울렁거렸다. 체한 것 같았다. 머리가 띵 하니 울리는 것도 같다. 눈물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 같다. 나는 슬픈 걸까. 그가, 사랑한다고 해주지 않아서? 그럴지도. 그럴지도. 이해를 했는데도 어째 더 아파져 오는 것 같다.

 

“요새, 질문이 많군.”

 

침묵 끝에 나온 답은 답이 아니었다.

 

“집에만 박혀 있어서 그런가 봐.”

 

그는 대답이 없다. 잠시 후 그저 식사나 하지. 하고 말을 했을 뿐, 답이 없었다. 그런 그의 행동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슬프게 느껴졌다.

 

침대에 자주 누워있게 된 이후, 눈이 가려졌으니 생각만 많아져 과거 행적을 조용히 밟았다. 꿈에서도 흐릿하게 나오는 흔적들은 항상 강렬한 빛과 부서졌다. 그 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그대로 눈을 떠보면 아침이 와 있었다.

 

내 하루 일상은 단조로웠다. 물을 마시고, 샤워하고, 밥을 먹는다. 그다음에는 침대에 앉아 있거나, 화장실을 간다. 이 모든 것은 내 기억이 있는 동안, 달라진 적 없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나를 안고 어디론가 이동을 했다.

 

“아저씨? 어디가.”

 

차근차근 몸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감각이 느껴진다.

 

“산책.”

 

“산책?”

 

되물음에 그는 조용히 계단을 다 내려가선 또 걸었다.

 

“네가 답답하다. 그래서.”

 

문이 달칵 열린다. 시원한 공기가 안대 위를 스친다.

 

“정원만 잠깐 걸을 거야.”

 

그는 풀 향이 나는 어느 곳으로 걸었다.

 

“나 신발 안 신었는데?”

 

“괜찮아.”

 

다칠만한 건 다 치워져 있으니까. 그는 숨 죽여 말하곤 나를 땅 위에 내려둔다. 흙이 생소하다. 눈이 가려지지 않았을 때도 이런 적은 아주 어릴 적에나 있었던 일이라 더 생소했다.

그는 옆에서 내 손과 어깨를 잡았다. 마치 중세유럽의 귀족 집 아가씨가 된 기분이다.

 

발에 이질적인 흙 부스러기가 묻는다. 발가락을 꼼지락 움직이면 풀이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그래도 좋았다. 시원한 공기와 닿는 온기가 좋았다.

 

잠깐 걷는다는 것이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오후의 먼지 냄새에도 내가 갈 생각을 보이지 않자, 그가 아예 안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더 있고 싶은데.”

 

“안 돼.”

 

뭐라 설득할 틈도 없이 그는 욕실에 들어가 나를 씻기고 침대에 올려다 두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에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자지 말고 있어. 식사 가지고 올게.”

 

똑같았다. 그 뒤로는. 밥을 먹고 소화가 될 때까지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부서지는 빛과 함께 또 꿈에서 깨어났다. 그럼 물을 마시고 그의 손에 따라 씻고 밥을 먹었다.

 

“있잖아, 아저씨.”

 

소리가 조용하다. 나는 독백을 하듯 허공에 말을 던져댔다.

 

“요새 악몽을 꿔.”

 

깜깜한 밤이었는데, 항상 밝게 끝나버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악몽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악몽인 것 같아.

 

그는 답이 없다. 늘 그랬듯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금세 흥미가 사라져서 나는 침대에 기대어 누워 베개를 끌어안았다.

 

“아저씨 그런데, 왜 아저씨는 나랑 같이 밥을 안 먹어?”

 

질문에 또 침묵이 감돌아 아- 재미없어. 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요새 말이 많아졌구나. 오소마츠.”

 

굳이 말을 삼킬 필요 없이 재미없는 답이었다.

 

악몽은 지속됐다. 악몽이라기엔 이상한 꿈은 계속 무언가를 꺼내려고 하는 것 같이 지속됐다. 그는 악몽을 꾼다는 내 말을 들은 날부터는 내내 내 옆을 지켰다. 차가 급정거 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깨었을 때도 그는 낮은 목소리로 괜찮을 거라며 나를 진정 시켰다. 익숙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침에 물을 찾는 일이 사라졌다. 밥을 먹는 시간이 조금 일러졌다. 내가 일어나기를 늦게 일어난 것일까. 입맛이 돋지 않아, 거부했더니 그는 스프를 끓여 왔다.

 

“보통은 미음을 가져오지 않아?”

 

“넌 그거 싫어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크림스프를 먹었다. 간이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는 날이 늘었다. 아침에 물을 찾는 일은 줄었다. 기력이 많이 약해지는 것이 몸으로도 느껴졌다. 무언가 축축 늘어지는 것이 계속 피곤했다. 그저 울고 싶은 것을 꾹꾹 참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아저씨.”

 

침대에 누워서 그를 불렀다. 작은 목소리임에도 그는 대답을 해왔다.

 

“왜?”

 

“내가 왜 이러는지, 아저씨는 알아요?”

 

그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아는구나.”

 

무언가 속이 시리도록 공허해서 울고 싶었다. 하늘이 파랬던 날이 계속해서 기억이 났다.

 

“있잖아요.”

 

“왜.”

 

그의 말이 조금 갈라진다.

 

“그 하얀 빛은-.”

 

입이 마른 것은 아닌데 끈적끈적하게 붙는다. 떨어트리기가 힘들다. 기력이 많이 쇠했나 보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예요?”

 

그는 대답이 없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인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맞구나.”

 

나는 들어주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이었다.

 

“그럼 있잖아요, 아저씨.”

 

“그만해. 그만해라, 오소마츠.”

 

그 말에 흐느낌이 느껴졌다. 가느다란 실이 뚝 끊기는 느낌이었다.

 

“그건 내가 잘못한 거였나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어.”

 

그의 말이 단호하게 끊긴다. 뒤에 이제 그만 하라는 말이 절박하다.

 

“그럼, 우리의 쌍방 과실이었나 보네.”

 

내 말에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그는 더는 이 말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향해 말을 던졌다.

 

“그럼 우리는 왜 이렇게 된 건가요?”

 

나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 안대에 눈이 가려져서 앞이 보이지 않으니 모르겠다.

 

“내가, 내가, 내가. 너를 가뒀어.”

 

뒷말이 힘없이 길게 빠진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리를 가리고 있던 이불 위로 액체가 무겁게 적셔진다.

 

“내가 부탁했구나.”

 

감정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감정이 끓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 비명 속에서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왜 그랬데요?”

 

그는 감정을 끓이느라 답을 하지 못했다.

 

“네? 아저씨. 대답해주세요. 제발.”

 

나는 그동안의 의문을, 앞으로는 묻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에게 쏟아냈다.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죠? 내 기억은 왜 이렇게 됐나요? 네? 아저씨. 제발. 나는 언제부터 카라마츠, 널 아저씨라고 부른 거죠? 있잖아요, 아저씨. 아저씨. 제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으니 안대가 축축하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아저씨, 제발. 제발. 지금 제가 졸업 한 이후로 도대체, 몇 년이나 흘렀나요?”

 

들리는 비명이 새되게 퍼져 나갔다. 그의 답이 낮게 나왔다.

 

“오소마츠, 넌 졸업을 하지 못했어.”

 

또 기억과는 다른 답이다. 눈은 따갑고 온몸은 멍한데, 정신까지 없었다. 그저 이대로 파란 하늘을 보고 그 골목에서 울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오늘인가요?”

 

그는 말이 없다.

 

“그럼, 그럼. 사고가 난 뒤부터 어떻게 된 건가요?”

 

내 계속된 질문에 울음이 묻어난 긴 숨이 들려왔다.

 

“난 몰라.”

 

“아저씨!”

 

무책임한 그의 말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오소마츠, 너는 무엇을 기억을 하는 거냐?”

 

처음으로 들어 본 그의 질문에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박 일 수 있다면, 열심히 깜박여서 그 수를 세었으리라.

 

“그냥, 그저. 내가 이 질문을 한 것이. 처음이 아니란 것만 기억이 나요.”

 

내 말에 그는 다시 길게 숨을 내쉰다.

 

“아저씨, 얼마나 시간이 지났나요?”

 

내 질문에 여전히 그는 답이 없다.

 

“아저씨. 아저씨는 도대체 왜-.”

 

내 말을 다 이어지지도 못한 채 그가 하는 말에 끊어졌다.

 

“오소마츠, 이젠 자야 할 시간이야.”

 

이질적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시간을 더 헝클인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내가 뱉은 말들이 하루사이에 일어난 일들이긴 할까. 머릿속이 더 엉켜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데, 그는 이제 답해 줄 생각이 없는지 나를 침대에 눕혔다. 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하게 되는 것이 나는 익숙하게 안대 속에서 눈을 감았다. 안대는 늘 그랬듯 적당하게 말라져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여지 것처럼 또 잊을까? 나는. 도대체. 이 엉망인 상황에서 왜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인가. 엉킨 실타래 중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 일은 내가 주도했다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래, 그랬으니까 그의 손길이 나쁘지 않았겠지 나는.

 

머리 위로 그의 큰 손이 턱턱 올려져 쓸어 넘겨진다.

 

“그만 자도록 해, 오소마츠.”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아저씨,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물어도 돼요?”

 

그의 손길이 완전히 멈춘다.

 

“네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몰라.”

 

네가 내 말은 정답이 아니라고 했지. 그의 의외의 답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 대로 터트리곤 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여러모로. 내일부터는 또 물을 찾을 것 같다.

 

“아니 그거 말고요.”

 

그의 손이 다시 움찔 움직이다가 품이 나를 감쌌다.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잔잔히 흐른다.

 

“그럼?”

 

그의 질문에 나는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가장 원론적인 질문을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왜, 나에게 결박되어 있는 건가요?”

 

숨소리가 고르다. 그는 이 또한 익숙한 듯 대답했다.

 

“너를 사랑하니까.”

 

그의 말 하나로 공허함이 가득했던 곳에 갑자기 무언가 차올랐다. 아, 아. 되었다. 그는 다시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졌나, 잘 모르겠다.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사실들에 벌어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 답을 언젠가 또 들었었다. 그것이 오늘인지, 오늘이 어디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을 들은 곳이 어떤 때에는 욕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주방. 장소가 달라질 때도 있고, 같을 때도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안대. 안대도, 그가 아니라 내가 썼다. 자진해서 그에게 결박되려 목줄을 걸었다.

 

언제였던가. 이 저택에 오기 전에 사고가 났었다. 그의 잘못은 없었다. 나는 당시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이었고, 그와는 고백하지 않고 사귀고 있었다. 어쩌면 순전히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에 간만에 친구들과 함께 시내를 거닐다가 그를 발견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고 있었다. 그것이 싫었다. 친구들의 목소리에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쾅-.

 

모든 것이 기억이 났다. 그가 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도. 이게 열쇠였다. 그 말이 하나의 방아쇠였다.

 

그는 이 생활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아니 가능성을 찾았던가. 글쎄. 나름의 재미는 찾은 것 같다. 그가 나를 취하지 않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다시 모든 것을 잊을 테니까.

 

안대를 벗지 못하게 한 이유도 그거였겠지.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이런 결과를 얻을까 봐.

 

아, 가엾은 사람. 미안하게도. 이 상황까지 왔음에도 나는, 그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와 붙어 있는 것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부탁했다. 그에게 내 목줄을 쥐어 주며, 그의 목줄을 가져왔다.

 

미안, 미안해 카라마츠.

 

이제 눈을 감으면 또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계획대로. 우리는 아마 평생을 그 미친 굴레 속에서 서로의 목줄을 쥐고 서로에게 얽매여 살겠지.

 

나쁘지 않은 결과다.

 

정말 미안해, 카라마츠.

 

나는 안대를 풀었다. 안대는 스륵 별 문제 없이 벗겨졌다. 기억과는 다른 붉은 색이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어쩌면 깨어있는지도. 뭐 상관은 없나?

두꺼운 눈썹이, 또 그의 단단한 얼굴이,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시간이 묻어나 보였다. 나는 그 위로 살짝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에게서 떨어지니 하품이 나왔다. 바깥에선 슬 동이 터온다. 그저 늦은 밤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정말 잠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다시금 안대를 묶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서 눈을 감았다.

 

이제 또 새로운 시작이다. 카라마츠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묶인 줄을 꼭 풀 수 있길 바라줄게.

 

안녕.

 

 

 

 

* 결박 [명사]

 

1. 몸이나 손 따위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동이어 묶음.

2.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 구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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