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hae08
수녀 이치마츠 X 악마 오소 X 마왕 이치마츠
“그 수녀를 감시해라.”
남자의 말에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악마는 고개를 들고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악마의 앞에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악마의 앞 까지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기억해. 너는 나의, 나의 것이니까. 얼굴이 같다고 빠져 버리는 건, 용서 안 해.”
* * *
“수녀니임- 잘 지냈음? 내가 또 왔다구?”
영롱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뜬 밤, 악마는 그 특유의 커다란 검은색의 날개를 펼치고는
어느 한 남자 수녀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난히 광택이 나는 검은 구두와,
그의 몸에 맞게 깔끔하게 떨어지는 슈트, 양 옆으로 쫙 뻗은 커다란 검은 날개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가 악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옆으로
살짝 휘어지게 솟아난 붉은 빛이 도는 뿔. 수녀의 앞에선 남자, 아니 악마는 창가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달빛을 받으며 웃음 지었다. 어느 누구라도 홀릴만한 미소였지만,
반대편에 마주한 수녀는 시큰둥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쉴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반응이 익숙한 듯, 악마는 발을 뻗어 한걸음 내딛고는 천천히 다가가 수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 안보고 싶었어? 수녀님? 나는 보고 싶었는데.”
“네. 전혀.”
수녀는 단호한 얼굴로 제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그 특유의 반쯤 감긴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악마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하잖? 무려 내가 직접 이렇게 열렬히 고백해 오는데 말이야.”
“악마에게 고백 받고 좋아하는 취미는 없는데요.”
“방금 그 말, 언제까지 유효할지 보자구?”
악마는 다시금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수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부터 겁도 없이 이 교회에 나타난 악마. 그 날도 오늘처럼 보름달이
형형하게 빛나던 밤 이었다. 그날따라 유독 잠에 들지 못했던 수녀는 창가에 기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순식간에 그가 있는 방이 붉은 빛으로 휘감아 지더니
위압감과 함께 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녀인 그의 특유의 반쯤 감긴 눈이 동그랗게 커져버린 것도 그의 등장이 한몫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오소마츠’라고 소개하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는 씨익 웃었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악마는 달리 수녀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교회에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제게 매번 좋지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뻔질나게 오는 것일까. 수녀는 마음속으로 깊은 의문을 품었다. 수녀인 자신과
악마인 상대방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태연
하게 웃고, 심지어는 끊임없는 고백까지. 수녀는 도무지 제 앞에 있는 악마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넘어가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까요.”
“정말이지~ 그런 식이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 받는다?”
오소마츠의 말에 수녀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상처 받는다’란 소리를 저보고 믿으라는 건가.
매사에 진지하게 행동하는 것을 여태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았는데. 애초에 상처를
받기도 하는지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악마가, ‘상처 받는다’라는 말을 한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수녀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시든지.”
“이거 안 통하네.”
“당신이라면 믿을 것 같습니까?”
“수녀님~ 나 이래봬도 감정 있거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오소마츠를 향해 수녀는 오소마츠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한 듯 ‘그렇습니까.’라는 말을 내뱉었다. 악마와 수녀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 치고는
꽤나 평범한 축의 대화가 별 의미 없이 오고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오소마츠는 그가 무심하게 툭 던지듯 뱉은 매정한 말에 정말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로
수녀를 쳐다보았지만 수녀는 끝내 오소마츠에게 시선을 두는 일은 없었다. 그제야 오소마츠 역시 질린다는 듯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나.”
‘또 보자고 수녀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빛으로 제 몸을 휘감고는
순식간에 수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녀는 그가 사라지고 정적만이 흐르는 방 안을
한번 스윽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사라진 후 그가 있었던 자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당연하게도, 남은 흔적은 없었다.
“오소마츠.”
남자는 그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제 무릎위에 앉아있는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남자가 걸치고 있는 옷의 장신구를 만지며 장난을 치던 오소마츠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마왕님?”
오소마츠의 입에서 ‘마왕님’이라 불린 남자는 한 팔에 다 들어오는 오소마츠의 허리를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일은, 잘 되 가고 있나?’ 그가 다정하게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의 말에 오소마츠는 별 다른 말없이 그저 실없는 웃음을 흘리기만
했다. 그런 오소마츠의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남자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까의 다정함과는 조금 다른, 약간의 단호함이 실린 어조로 물었다.
“너는,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남자의 눈은 평소의 나른함이 담긴 눈빛과는 달랐다. 빠져나갈 수 없다는 듯 오소마츠의
허리를 단단하게 휘어 감고, 남자의 두 눈에 오롯이 담긴 매혹적인 얼굴을, 약간은 붉게
상기되어 있는 두 뺨을,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입술을 차례대로 그의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명심해. 널 여기까지 키운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야.’ 이것은 명백한 소유욕이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남자가 그에게
거는 속박과도 같은 말이었다. 오소마츠는 남자의 말을 듣고도 조용히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 * *
늦은 밤, 수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찾아오던 악마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진 몰라도 꽤나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가는 듯 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기분이 좋을 정도의 바람이 살랑이며 수녀의
앞머리를 흩어놓았다. 수녀는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아래쪽에 있는 화단에
시선을 두었다. 어두워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랑이는 바람에 꽃들이 나풀
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수녀는 입가에 작게 웃음을 띠었다. 최근에 비하면 그 어느 때
보다 조용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도 잠시, 화단이 있는 아래쪽에서 ‘냐옹-’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수녀는 그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뭇잎을 밟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털이 유독 빛나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
수녀가 입을 열자 고양이는 다시 한 번 ‘냐-’하고 울었다. 고양이는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을 한 번 하고는 검붉은 빛이 도는 눈을 떠 수녀가 있는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수녀는 허리를 좀 더 앞으로 숙여 고양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평소 고양이를 깨나
좋아했다. 교회에 가끔 나타나는 길고양이들에게 줄 멸치나 간식을 구비하고 있을 정도로
그는 고양이에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을 대할 때 보다 고양이를
대하는 그의 표정이 좀 더 다정하고, 너그러운 편이었다. 수녀는 아래에 있는 고양이와
마주보다가 돌연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마른 멸치를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시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멸치를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고양이 역시 그에 반응하듯
닿지 않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앞발을 흔들며 멸치를 잡으려고 애를 썼다.
수녀는 그런 고양이의 행동이 귀여운 듯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장난치듯 멸치를 흔들다가
고양이가 먹을 수 있도록 땅으로 툭 하고 떨궈주었다. 멸치가 제 앞으로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멸치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수녀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맛있니 나비야.”
역시 대화가 통할 리는 없겠지만. 그가 말을 걸고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멸치를 다 씹어
삼킨 고양이는 혀로 입 주변을 핥고는 다시금 수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더 먹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어서, 수녀는 멸치가 들어있는 봉투에서 멸치를 몇 개 더 집어 고양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을까. 그럼 줄게.”
그는 손바닥에 멸치를 올려놓고는 흘리지 않을 정도로만 좌우로 살살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뛰어도 여기까진 조금 무리겠지만. 라는 뒷말은 삼키기로 했다.
고양이가 있는 땅과 제 방의 높이는 아무리 잘 뛰는 고양이라도 단숨에 올라오기엔
무리가 있는 높이였다. 그러니 그는 이번에도 역시 적당히 놀아주다가 땅으로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고양이는 이번에도 그의 손바닥을 따라 시선을 요리조리 흔들다가 저를
가지고 노는 사람에게 슬슬 약이 올랐는지 제 몸을 준비운동을 하듯 쭉 늘렸다가 꼬리를
바짝 세워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단숨에 뛰어 올랐다. 예상하지 못한 고양이의
행동에 두 눈을 크게 뜬 수녀는 높게 뛰어오른 고양이를 받아내려 허리를 좀 더 앞으로
숙였다. 다행히 고양이는 그의 두 손바닥에 안착했고, 안전하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양이를 안아든 그는 하아-. 하고 조금은 긴 한숨을 쉬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런 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양이는 그의 품에서 제 앞발을 핥아내며
태평한 태도를 취했다. ‘넌 편해서 좋겠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대답을
하듯 고양이 역시 ‘냐아-옹’하고 울었다. 이로써 그의 간밤의 평화는 고양이의 등장으로
깨져버렸지만 그는 꽤 즐거운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고양이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가볍게 바닥에 착지 하고는 고개를 위로 꼿꼿이 들고 수녀를
바라보았다. 수녀 또한 고양이를 마주보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왜 그러니 나비야.”
그가 고양이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물었다.
“나보다 이런 고양이 모습이 좋았던 거야?”
“...?”
방금 뭐지? 수녀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방 안을 살폈다. 분명 제가 아는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왼쪽도, 오른쪽도, 뒤도, 심지어 천장까지
올려다보았지만 제 시야에 보이는 생명체는 제 앞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 뿐 이었다.
그렇다는 건, 혹시... 설마. 진짜란 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본인 앞에 있는 입도 뻥긋
하지 않았는데.
“아무도 없다구. 나밖에는.”
설마, 설마 했던 것이 사실로 다가왔다.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 설마하니 제 앞에
고양이가 그 악마였다니. 그는 이제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제 눈앞에 고양이가 악마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검붉은 눈동자 색 역시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다른 고양이들과 다르게 특이한 색을
가졌구나 싶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빛나는 눈이 마치 보석과도 같아서
꽤 예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약간의 허탈함과 공허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사람 놀려먹으니 재밌나요.”
그가 아직 고양이의 모습을 한 악마에게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고양이, 아니 악마는 별 다른 대꾸도 없이 제 귀를 한 번 쫑긋 거리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제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놀리다니? 그냥 같이 논 것 뿐 이잖아. 수녀님도 솔직히 고양이인 내가
좋았던 거 아니었음?“
그의 말에 수녀는 사실 마음속으로 조금 찔려했다. 고양이로 변했던 그와 보낸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자신의 표정부터가 달라졌음을 그도 알고 있으리라.
그런 탓에 수녀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라, 인정하는 거?”
“... 고양이였으니까요. 그건 당신이었지만 당신이 아니기도 하니까.”
그는 왠지 어떻게든 명분 하나쯤은 만들어내고 싶었다. 괜히 악마에게 말려드는 기분에
자신 역시 즐거워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유치한 심술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뭐, 덕분에 수녀님의 웃는 얼굴 봤으니까. 그걸로 나도 만족!”
그가 웃으며 말을 할 때 마다 수녀는 점점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웃는 얼굴
이라던가, 평소보다 풀어진 모습 같은 것을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보였다는
것은 정말이지...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태연하게 웃음 짓고
있는 상대방의 기억을 소멸시킬 수는 없을까 잠시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잊어요.”
“엥? 아무리 수녀님이 부탁을 해도 말이지, 그건 힘들겠는데~ 애초에 내 기억까진
스스로 못 지우니까. 할 수 있어도 안 할 거지만!“
‘절대 잊을 리가 없잖아. 비록 고양이긴 했지만, 날 향한 유일한 미소였는걸.’
‘다음번엔 꼭. 고양이가 아닌, 날 향해 웃어주라 수녀님.’
차마 꺼내지 못할 말들은 가슴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 * *
“부르셨습니까. 마왕님.”
“왔구나. 토도마츠.”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고양이가 집을 나갔지 뭐야.”
“고양이요?”
마왕에게 ‘토도마츠’라 불린 한 악마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그가 한 말을 되물었다. 갑자기 웬 고양이? 마왕님이 고양이를 키운다는
소리는 여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 너도 알고 있는 고양이다.”
토도마츠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려 제가 알고 있는 고양이의 정체를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마왕이 유일하게 곁에 두고 아끼는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가 종종
변해있던 동물이 아마, 고양이였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토도마츠는 마왕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고는 짧게 아,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평소 하는 행동으로 봐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당신의 고양이 분께서 무슨
사고라도 친 모양이었다.
“집을 완전히 나간 건 아니지만. 곧 나갈 것 같단 말이야... 이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네. 그러니까, 네가 나서줘야겠다. 토도마츠.“
“감시 정도면 되겠습니까?”
“그래.”
* * *
“수녀님 있어? 수녀니임-!”
오소마츠는 수녀가 있을 방의 창문을 노크하듯 두어 번 두들겼다. 그때마침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오소마츠를 발견하고는 짧게 한숨을 쉬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마음 같아선 절대 열어주고 싶진 않았지만 어차피 끈질기게
열어달라고 할 것이 뻔했고, 기어코 들어올 것이 뻔했으므로, 그는 반쯤 포기한 채로
방의 창문을 열어주었다.
“헤에, 오늘은 꽤나 호의적인 걸?”
“별 수 있나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들어올 생각 이지 않습니까.”
“빙고-! 잘 알고 있잖?”
“그야 당신이 늘 그러니까요.”
“늘 매몰차게 구는 수녀님도 대단하다니까~”
오소마츠는 제 어깨를 으쓱이며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오히려
못 당하는 쪽은 아무래도 수녀인 자신이지 않을까 싶었지만. 더 싫은 것은 점점 이런
일들이 익숙해져 가는 자신이었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게도, 눈앞에 있는 악마에게
어느 샌가 익숙해져 가는 것이 못내 싫었다. 제 눈앞에 악마가 싫은 것 보다 늘 이런
식으로 휘둘러지는 자신이 더 싫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파고들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는 안됐다. 더는, 더는 안 된다고. 그는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되뇌었다. 더는 저 악마에게 휘둘려서는 안된다. 더 그랬다간...
“당신과 내가 어울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런 것 치곤 수녀님 요즘 본인도 자각할 수 없을 만큼, 날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구?”
사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빛. 그래, 저 눈빛이다. 자신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저 눈동자.
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왠지 모르게 넋을 놓을 것만 같아서, 항상 시선을 살짝 틀어서
보거나 똑바로 마주보더라도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악마의 붉은 눈동자는 제게
있어선 늪과도 같았다. 방심하다보면 어느 순간 빠져버릴 지도 몰라. 수녀는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건 당신의 착각이겠지요.”
“뭐-.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수녀님.”
한 발짝, 두 발짝, 마지막 한 발짝만 더 오게 된다면 그는 수녀의 바로 코앞까지
오게 된다. 수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위험해. 위험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빨간
불이 켜졌다. 두 사람 사이엔 어느새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흘렀다. 한쪽의 일방적인
긴장감일지도 모르지만. 수녀가 뒤로 조금씩 물러나면 물러나는 대로 악마 역시
느릿한 걸음으로 한발자국씩 걸어갔다. 그의 얼굴엔 여유로운 웃음이 걸렸다. 어차피
뒤로 물러나봤자, 그 끝엔 막다른 벽이 있을 터였다. 결국 제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이 방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소마츠의 예상대로 막다른 벽이 수녀의 등에
닿자,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소마츠는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천천히 한쪽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뺨 위에 얹었다.
“솔직히 말하면, 벌써 나한테 끌리고 있는 거 아닐까나.”
평소보다 한층 낮은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소마츠는 그에게 가까이 숙였던
상체를 살짝 떼고는 아직까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며 눈을 반쯤 내리고는 여전히
제 시선을 피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몇 초정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보고 있었을 때
줄곧 제 시선을 피하던 보랏빛 눈동자가 올곧은 눈으로 저를 마주보며 말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으니 사실대로 말해볼까요.”
“어라, 어째 태도가 조금 바뀐 것 같은데?”
수녀는 악마에게로 손을 뻗어 단정하게 매어진 넥타이를 잡아 당겨 얼굴을 제 쪽으로
가까이 당겼다. 이런 예상치 못한 행동에 줄곧 여유를 담았던 오소마츠의 얼굴에선
어느새 여유가 사라져갔다. 평소 그를 밀어내기만 했던 태도와는 달리 오히려 저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것이 목적인진 몰라도 확연히 달라진 태도에 오소마츠는 적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수녀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오소마츠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 순간,
유리가 깨지는 파열음이 들려왔고, 그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 역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쏠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창문의 유리조각을 사뿐히
밟고 한 남자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그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오소마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남자 쪽으로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토도마츠?”
“오랜만이네? 오소마츠 형. 아니, 마왕님의 고양이씨.”
“너, 너 어떻게 알고 왔어?”
“나? 그야 당연히 마왕님의 지시가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맡은 건 감시 정도 뿐 이지만 말이지.
그는 책을 잡힐만한 뒷말은 삼키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해보려 했다. 비슷한
얼굴을 한 악마가 두 명. 한쪽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던 오소마츠. 다른 한쪽은
토도마츠라 불리는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악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수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오소마츠의 반응으로 봐선 둘 사이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은 것 같다.
“마왕님이? 어째서...?”
“그건 형이 더 잘 알지 알겠어?”
토도마츠의 시선은 오소마츠 옆에 있는 수녀에게로 꽂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는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가 없었으니, 오소마츠는 제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여기서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분명,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람은 제 옆에 있는 수녀님일 것이
뻔했다. 오소마츠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둘만 있다면 자신이 지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오소마츠는 토도마츠의 말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뭔데.”
“그냥 얌전히 지금 날 따라와 주면 돼~”
오소마츠는 제 옆에 있는 이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네. 수녀님. 다음에 또 올게?“
그는 오소마츠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토도마츠와 오소마츠.
두 사람이 사라진 방 안은 그야말로 폭풍이라도 휘몰아치고 간 듯 했다. 깨진 유리창
부터가 절로 한숨을 쉬게 만들었다. 난데없는 등장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 * *
“윽, 아파. 아프다구. 마왕님,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뭐하긴. 보면 알잖아.”
토도마츠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마계로 끌려온 오소마츠는 토도마츠가 제 임무를 다 한 후
사라지고 난 뒤 다짜고짜 마왕에게 양 손목을 잡혀 마력을 제어하는 수갑 모양의 구속구가 제 팔목에 끼워졌다. 아무래도 마왕은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적어도 오소마츠가
알고 있는 마왕님은 그 어떤 순간에도 저를 이렇게 험하게 다루는 일은 없었다.
“저기, 마왕님. 말로 하자구?”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오소마츠.”
냉담한 그의 말에 오소마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의 심기를 더 건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아무리 그에게 사랑받는다 해도
화가 난 상태의 그를 건들인 다면 저라도 무사하진 못할 것 이라는 것쯤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왕. 그에게 있어 ‘오소마츠’란 존재는
전부였고, 유일한 낙원이었고,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그런 그가 눈을 돌린 곳은
자신 이외의, 그것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존재인 ‘수녀’에게 향해 있었다.
잠깐의 유희 정도라면 괜찮았다. 그 정도라면 너그럽게 봐 줄 수 있었다.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이 자신이라면, 그깟 유희정도야 사랑하는 널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마음이 자신을 향하기만 한다면. 그걸 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유희’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오롯이
자신만을 담아내던 눈이 다른 이를 좇고 있었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텅
비어버린 것들 뿐 이었다. 이런 그에게 온전한 사고회로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오소마츠, 넌 누구의 것이라고 했지. 응?”
“......”
“말하지 않겠다는 건가. 뭐, 좋아. 정답은 아주 쉬워. 그 말만 한다면 험한 꼴은
겪지 않을 거야.“
“......”
오소마츠는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 마냥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오소마츠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말하고 싶진 않았다.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곧 거짓을 말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을 것이 하나 없었다.
“말해. 날 사랑한다고 말해. 오소마츠, 어서.”
“미안.”
짧고도 간결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그 특유의 웃음을 띠운 채로 말했다.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째선지 조금 슬픔이 담겨있는 듯 했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왕은 작게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잖아...‘ 이 말을 끝으로 마왕의 눈빛이 조금 바뀌어갔다.
분노나 살기와는 다른,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오소마츠를 내려다 보다가 그는
거칠게 오소마츠의 머리채를 잡아채곤 끌어 올렸다.
“딱 한번만. 한번만 기회를 줄게. 날 사랑한다고 말해.”
“있지, 마왕님. 나는-”
수녀님을 사랑해.
아아, 나의 오소마츠. 너는 끝까지 내 심장을 도려내는 말로 날 죽이는구나.
지독하게도 너는, 새빨간 거짓이라도 끝내 날 사랑한단 말은 하지 못 하는 거냐.
지금 이 순간 나는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니면, 나에게서 널 뺏어간 그 수녀를
죽여 버리면 될까.
“그러니까 마왕님. 차라리 날 죽여줘. 그는 건들지 말고.”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했다. 거짓이라도 자신을 사랑한다 말해줬으면. 그랬다면
이런 더 괴롭기만 한 말은 듣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마왕은 미간 사이를 찌푸렸다. 네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짜증나는 말들이 아니었다. 웃으며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네 모습이었지. 다른 이를 보며 웃으며 사랑을 입에 담는 네가, 아니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그럼 나도 죽어. 마왕님은 그걸 원하는 걸까나.”
“조용히 해. 더 이상 말 하지 마.”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더 이상 말 하지 말라고 했어 오소마츠.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그런다고 내가 다시 돌아갈 일은 없, 아악!”
마왕은 오소마츠의 머리채를 다시금 잡아 그를 끌고 어느 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루어 진 것 같은 바닥은 이곳이 방 안 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무성한 풀들이 자라고 그 위로 나무가 뿌리를 박고 솟아올라 있었다. 마왕은
이 공간에 그를 집어 던지고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 봤다.
“사랑? 악마인 널 나보다 사랑해 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소마츠의 주변으로 초록색의 넝쿨들이 땅 속에서 돋아나선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미 묶인 양 손목과 발목, 허리까지 넝쿨들로 묶인 채로
그의 몸이 공중에 띄워졌다. 마왕은 그 관경을 밑에서 바라보며 작게 조소를 흘렸다.
아무데도 못가. 말 했잖아. 너는 나의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