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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eral

 

쵸로오소 합작 (여신과 악마 AU) / 제목 : Intoxication / 레멘 (@dueral)

 

 

 

“ 여신님, 타락해버리지 않을래? ”

 

언제 적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를, 남자는 회상한다. 내뱉는 내용만큼이나 무척이나 가벼운 목소리였다.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면, 남자는 그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듣기에는 썩 나쁘지 않는 목소리였으나, 그것에 묻어있는 가벼움은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는 그저 익숙함의 부재 탓이라 얼버무릴 것이다.

 

매일같이 그를 깨우며 시끄럽게 재잘거리던 목소리, 그의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던 목소리, 하지만 이제는 아마 들을 일이 없을 목소리. 후회인가? 아니면 그리움? 남자는 그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제 감정들을 쉽사리 정의하지 못했다. 본디 순수했던 존재였던 탓인지 그에게 감정이란 아직은 생소한 것이었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 중에서 그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아쉬움과 후회는 없다는 후련함이었다.

 

 

“오늘도 정말 조용한 하루네요.”

 

남자는 가만히 잔을 들어 한 모금 차를 홀짝이며 눈앞의 상대를 향해 살풋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참으로 조용한 오후였다.

 

 

***

 

 

마을의 외곽 뒤편에 위치한 어느 이름 모를 숲에는 외로운 신이 한 명 살고 있었다. 신에겐 비록 ‘쵸로마츠’란 이름이 있었으나, 누구 하나에게 그것을 불린 적도, 알려달라고 요청받은 적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모두 홀로 숲의 작은 샘에 사는 그를 ‘샘의 여신’이라 불렀다. 신은 엄연히 남성의 모습이었고, 또 샘을 담당하고 있는 신도 아니었으나, 그는 딱히 그 호칭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불릴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이름이었으니, 그저 남들에게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남자는 실로 숲에서 즐기는 조용한 티타임을 즐겼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취미는 아니었으나, 상대의 변덕에 어울리다보니 어느새 하루 일과처럼 굳어져버렸다. 아무것도 없는 이 외딴 숲에 티테이블이며 찻잔을 들여놓은 것도 그 상대의 노력이었다. 이제는 비록 티타임의 주최자가 상대에서 남자로 바뀌어, 더 이상 테이블 위에 이름 모를 검은 음료나 과자가 올라오진 못했지만, 함께 시간을 즐기는 데에는 꽃차와 약간의 과일이면 충분하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론 상대가 원했다면, 기꺼이 남자는 함께 사러가자고 했을 터지만.

 

 

“평화롭네요.”

 

여전히 상대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여기가 지루하다고 했죠. 틀린 말은 아니네요. 확실히, 평화엔 지루함이 함께 찾아오죠.”

“…….”

“대답, 없으시네요. 물론 힘들다는 건 알지만. 왜 이런 고집을 부리시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고개 하나 까닥하면 다 풀려날 일인데.”

“…….”

“흠, 뭐, 좋아요. 그래도 심심한 건 매한가지니, 우리, 이야기나 좀 해보도록 하죠. 뭐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아! 그래요, 아주 옛 이야기부터 하기로 해요. 예를 들어, 처음 만났을 때라던가. 좀 길긴 하겠지만 알다시피 우리, 시간은 아주 많으니까요.”

 

남자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는 찬찬히 입을 열었다.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청하는 일은 이제와 딱히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과거를 입에 담는 건 처음이었다. 남자는 딱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즐기지 않았다. 적어도 상대는 그렇게 생각했을 게 분명했다. 남자는 시선을 피하는 상대의 몸짓에 조용히 웃었다. 아아, 어찌 저런 것도 사랑스러울까.

 

남자는 잠시 목을 다스렸다.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끊어야할지 고민하며 남자는 상대를 지칭할 단어를 골랐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있었지만 고작 이런 이야기에 등장시키기엔 아까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저 상대를 ‘당신’이라는 두루뭉술한 호칭에 가두기에는 그가 너무 소중했다. 결국 남자는 한참의 고심 끝에 처음 상대를 불렀던 그 호칭, ‘악마 씨’라고 타협을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악마 씨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무턱대고 이 숲을 침범한 건 악마 씨였죠. 악마 씨의 그 빌어먹을, ―아 미안해요 요즘 급격하게 말투가 거칠어져서요. 정정하죠, 그러니까 악마 씨의 그 …… 호기심 때문에 저를 찾아왔죠. 제가 있는 샘에 돌멩이를 가득 던져서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썩 기분이 좋진 않네요. 정말이지, 제가 샘에 떨어진 물건들을 전부 다 주워서 돌려준다는 건 어디서 들었는지……. 덕분에 떨어지는 돌멩이들을 줍다가 한 대 맞는 줄 알았네요.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고 올라왔더니 처음 들은 질문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아나요?”

 

 

***

 

 

고요했던 샘에 파동을 일으킨 것은 어느 검은 날개를 달고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여신은 그 존재를 불청객 이상으로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얼굴에 가득 호기심을 바른 채 대뜸 여신의 옷을 들쳐본 악마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여신에게 물었다.

 

당신, 변태야?― 참으로 간결하고 파급력 있는 대사였다. 여신은 무언가 무척이나 창피한 일을 당했다는 건 알았지만, 질문의 뜻은 파악하지 못했다. 변태가 무엇인데요, 하고 반문하면 악마는 댁처럼 남자면서 여신이라고 뻥치고 다니는 거라고 답했다. 여신의 주먹이 악마의 얼굴에 강타한 건 순간의 일이었다.

 

 

***

 

 

“난 악마 씨가, 호기심을 충족했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혹시 그랬어야했다고 생각하나요? 어느 정도는 동감해요. 하지만 악마 씨는 곧 새로운 흥미를 품고 제게 왔고, 저는 그게 부끄럽게도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불청객이라도, 손님은 손님이었으니까요.”

 

 

***

 

 

악마는 그 후로도 여신을 계속 찾아왔다. 대부분 시답지 않은 이유였다. 심심해서, 알고 싶어서, 재미있으니까. 생전 처음 듣는 이유들이었고, 처음 듣는 이름의 감정들이었다. 숲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는 여신의 말에, 다음엔 악마는 인간세계를 알려주겠다는 이유로 여신을 찾아왔다. 가끔은 무언가 손에 들고 온 채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악마는 여신에게 티타임이라는 걸 가지자고 했다. 그 말을 꺼내든 것은, 그가 언제나처럼 무언가를 소개시켜준답시고 가져온 갈색의 과자에 여신이 감탄한 다음날이었다. 악마는 매일 과자들을 가져올 테니 가만히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뭐라도 좀 먹으면서 즐기자고 했다. 왜 굳이 샘을 나와서 의자라는 것에 앉아서 먹어야하는 지 몰랐으나, 인간들이 즐기는 문화중 하나라니 여신도 그저 그러려니 했다. 아닌 척 따라주면 악마는 기뻐했고, 그러면 여신도 조금은 즐거웠다.

 

 

***

 

 

“티타임. 그립네요. 처음 가져왔던 과자가 초코칩 쿠키였던가요? 또 사러 갈래요? 아 물론, 같이요. 저는 길을 모르고, 악마 씨를 혼자 두기엔 위험하니까요.”

 

―남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다시금 둘 사이엔 적막이 흘렀다. 남자는 내려놨던 찻잔을 다시 기울이고는 이내 말을 다시 이었다.

 

 

“…실례, 화제를 엉뚱한 데로 돌려버렸네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러니까 음, 난 즐거웠고, 다음을 기대하게 되었어요. 악마 씨가 없는 나날을 슬퍼하고, 조금은, 음, 뭐랄까 지금처럼 심심하다고 느끼면서 말이에요.”

 

 

***

 

 

여신은 본디 순수한 존재였다. 새하얀 백지처럼, 그의 마음에는 어떠한 불순물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노나 기쁨, 따뜻함이나 차가움과 같이 아주 기본적이고 일시적인 감정과 느낌으로 한정되어있었다. 외로움, 우울, 소유욕과 같은 짙은 감정은 전부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한 번도 느낀 적도 없었고, 느껴서도 안 될 독이었다. 단 한 방울만으로도 도화지를 검게 물들어버릴 수 있는 그런 먹물처럼, 한 발짝 다가간 순간 그것은 그를 단숨에 잠식시켜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

 

 

“전 당신이 했던 행동, 말, 물음들을 전부 기억해요.”

 

 

***

 

 

여신님, 여신님은 이름이 뭐야? 어느 날 악마는 문득 여신에게 물었다. 처음 받아보는 질문에 여신은 잠시 두 눈을 뜨고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름이 없는 거야?―하고 답지 않게 조심스레 물으면 여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라서요. 이름 같은 거 오랫동안 잊고 살았거든요.

 

그 말에 악마는 싱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나는 이름에 뭐 중요한 거라도 걸려 있는 줄 알았네. 악마에게 이름은 꽤나 중요한 거거든. 뭐 여신님이라면 다는 아니지만 반은 알려줄 수 있는데, 어때? 같이 이름 공개나 할래?

 

 

***

 

 

“오소마츠. 악마 씨의 이름이죠. 이쁜 이름이라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나중에 풀네임도 꼭 알고 싶네요. 그것까지 저와 닮아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아, 기억하죠? 내 이름. 악마 씨 이름하고 비슷하다고 좋아하고 그랬잖아요. 아아, 그땐 우리 둘 다 참 좋았었는데, 이런 게 상실감일까요? 아닌가? 단순히 슬프다는 감정 이상의 감정인데, 잘 모르겠네요. 악마 씨는 잘 아나요?”

 

 

***

 

 

악마는 무척이나 박식했다. 같은 시간을 훨씬 다양한 공간을 오가며 지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악마의 이야기엔 언제나 새로운 장소와 사건들로 가득했고, 그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것은 여신도 마찬가지였다. 미지의 것을 알아간다는 지식의 즐거움도 있었으나, 여신은 그냥 그 시간 자체가 즐거웠다. 매시간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고, 그가 과장시켜 움직이는 몸짓 하나하나마다 가슴이 뛰었다. 가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여신님도 언젠가 보러가자, 하고 소리치면, 붙잡힌 손끝이 화끈거리고 숨이 가팠다. 이처럼 여신은 행복했다. ―악마가 가르쳐준 것처럼, 그것이 정녕 행복감이라는 감정이 맞는다면 말이다.

 

악마는 자신과 같이 타락해버린다면, 이 지루한 곳에서 묶여있지 않고 자유롭게,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신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더 행복해진다는 말도, 자유로워진다는 것의 의미도 잘 몰랐다. 애초에 그는 자신이 여기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이 평화로운 곳에, 매번 이렇게 악마가 자신을 찾아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신은 생각했다.

 

비록 악마가 가보았던 곳을 함께 가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

 

 

“악마 씨, 저는 언제나 함께 라는 전제를 품고 있었어요. 저는 언젠가 보러가자는 말도 악마 씨가 데려다주는 걸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마요. 악마 씨도 항상 ‘나처럼’, ‘나와 같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잖아요? 비록 그것이 단순한 유희이었다고 해도. …딱히 화는 아니고, 그냥 묻고 싶어요. 왜 갑자기 저를 떠나겠다고 했나요?”

 

 

 

***

 

여신님, 안녕. 악마는 마치 가벼운 굿나잇 키스라도 보내는 듯이 말했다.

 

뭐?―라고 여신이 반문할 새도 없었다. 인간이랑 새롭게 계약을 하게 될 것 같거든. 그래서 좀 오래 떨어져 있을 것 같아. 그 전에 여신님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지만, 뭐 그건 이젠 됐어. 나도 즐거웠으니까, 그거면 충분하잖아? 기다려달라는 말은, 음, 못하겠네. 좀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서. 여신님도 그냥 가벼운 유희 정도로 생각해 둬. 그럼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거야. 그럼, 안녕이야,

 

쵸로마츠.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삼켜버린 독이 온몸을 타고 역류했다. 분노라고 하기에는 그 독의 기운이 너무 강했다. 여신은 갑작스레 안녕을 고하고 떠나가겠다는 악마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악다문 잇새사이로 감정을 비집고 튀어나왔지만 악마는 그런 여신의 감정에는 무감각해 보이는 듯 했다. 악마는 정말로 이제 떠나가려는 것처럼 검은 날개를 펄럭였다. 그 순간 여신은 낮은 비명과 함께 주먹을 가득 쥐었고, 그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가할 때마다 숲의 나무들은 울창하게 시야를 막았다. 악마가 놀라 발을 떼려는 순간, 뿌리와 넝쿨이 땅을 뚫고 솟아오르며 그를 붙잡았다.

 

 

***

 

 

“……”

 

 

***

 

 

단단한 나무뿌리는 악마의 발목을 휘감아 붙잡아두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양손은 뒤로 포박된 채로 넝쿨에 묶여 그 자유를 박탈당했다. 바르작거리며 튀어 오르는 몸도 곧이어 솟아오른 넝쿨들로 인해 강하게 결박되었다. 뚫을 듯이 살기를 품으며 노려보는 두 눈을 억지로 가려놓고, 난생 처음 듣는 거친 말들을 내뱉는 입까지 모조리 메워놓으면, 그는 완전히 여신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여전히 포기할 줄을 모르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 넝쿨들을 벗어내려고 바둥거리는 악마를 껴안으며, 여신은 가만히 목소리를 낮췄다.

 

쉬이, 진정해요. 움직이지 마요.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상처가 나면 큰일이니까요. 아아, 쉬이, 제발 가지 마요. 아, 그래요, 우리 또다시 티타임이나 가질까요? 언제나 그랬듯이.

 

 

***

 

 

“……너무 그러지 마요. 악마 씨 탓이에요. 그러게 누가 제 이름에 의미 같은 거 만들라했나요.”

 

 

***

 

 

쵸로마츠. 별 의미 없는 이름이었을 터였다. 여신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면 ‘여신’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 정도의 거리가 딱 적당했다. 하지만 그가 이름을 부르며 기뻐했을 때, 자신의 것과 닮았다며 마치 형제 같다고 악의 없이 웃음 지었을 때, 여신은 독에 빠져버렸다.

 

 

***

 

 

“축하해요.”

 

읍픕픕― 묶여진 입이 시끄러웠다.

 

 

“당신의 잘난 입버릇대로, 날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어요.”

 

남자―한 때 여신이라 불렸던 자, 쵸로마츠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눈을 접으며 활짝 웃었다.

 

 

“사랑해요, 오소마츠.”

 

쪽―하고 입술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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